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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콥트 교회
지역 이집트 작성일 2012-09-18 조회수 0
집필 : 이인식 목사(시카고 동양선교문화연구원장)

1. 들어가는 말
구약 성서를 보면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 남은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셈과 함과 야벳이다. 이 세 아들들은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세계 인종의 조상이 되었다. 즉 셈은 황색 아시아 인종의 조상, 함은 검은색 아프리카 인종의 조상, 야벳은 흰색 유럽 인종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지금까지 그 삼분의 일의 아시아인과 또 그 삼분의 일의 아프리카인과 또 다른 삼분의 일의 유럽인으로 구성되어 내려 온 것이다. 따라서 이 셈과 함과 야벳 이 셋은 대륙의 넓이로나 역사의 길이로나 정치적 세력으로나 종교적 분포로나 언제나 균등한 세력으로 시소를 거듭하며 항상 대립해 왔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현재까지 눈에 보이는 기독교는 야벳의 서구 기독교로만 대표되어 온 것 같지만 이 셋은 눈에 보이지 않게 언제나 서로 대립하며 갈등해 왔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우리가 살피고 있는 안디옥 교회와 에뎃사 교회와 콥트 교회의 역사인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서구 유럽 기독교의 모 교회이고 에뎃사 교회는 동양 아시아 기독교의 모 교회이며 콥트 교회는 아프리카 애굽 기독교의 모 교회가 된다. 그런데 이 세 개의 모 교회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되는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가 출산시켜 놓은 세 아들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 셋은 역사에서 항상 동등하게 대립해 왔다.
이번 달에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콥트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콥트 교회가 아시아의 동양 기독교는 아니지만 동양 기독교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콥트 교회의 역사를 알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아프리카 교회로서는 콥트 교회뿐만 아니라 에디오피아 교회 등 다른 독립 교회들도 있으나 콥트 교회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다.


2. 콥트 교회의 역사
콥트 교회란 콥트어를 쓰던 교회를 말한다. 콥트어는 과거의 이집트 언어, 즉 옛날 애굽인들이 사용하던 고대언어를 말한다. 옛날부터 이집트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제국의 나라였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 콥트 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그 비중이 대단히 크고도 중요했다.
콥트어(Coptic language)는 고대 이집트 왕 파라오들이 사용하던 언어에서 직접 전수된 최종 단계, 즉 기원전 1570년 이집트 신 왕국시대에 쓰던 관용어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 역사는 무려 4000년 전을 헤아린다. 그러나 이 콥트어는 현재 죽은 문자가 된 언어이기 때문에 지금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단지 지식층에 속하는 200여 명에 불과한 사람들만이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 콥트어라는 명칭은 고대의 명칭이 아닌 현대의 명칭으로서 아라비아 말로 굽티(Qubti)를 유럽식으로 표기한 이름으로서 헬라어로 애굽티오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10에서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 제자들이 말한 방언들 중에 애굽어(이집트 인의 언어)를 언급할 때 헬라문자로 아이굽톤, 즉 이집트인의 언어라고 표기를 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콥트인들 자신은 그들 스스로 언-럽-언-카메(NPMNKHME), 즉 검은 대륙의 백성(이집트 인)이라 자칭하여 왔던 것이다.
이 콥트어의 수난은 주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공용어를 헬라어로 사용하도록 조치를 취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콥트어는 그 본국인 이집트에서마저 제2외국어로 천대를 받게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함의 후손들이 야벳의 후손들의 종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서가 타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던 주후 200년 경에는 콥트어의 표준적인 표기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상 용어로서의 콥트어는 토착화된 헬라어와 많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그 후 641년 마침내 이집트가 아랍인들에게 정복을 당하자 그때부터 콥트어는 완전히 말살되고 대신 모든 사람들이 아랍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함의 후손은 다시 또 셈의 후손들의 종이 되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창 9:25, 26, 27).

(1) 기원과 초기역사
콥트교회의 기원은 함의 후손들이 벌써 야벳의 후손들의 종이 된 이후의 역사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점령은 환영에서가 아니고 강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후 나타난 점령자들에 대한 헬라문화, 즉 헬레니즘에 대한 반동은 점령을 당한 모든 민족들의 내적투쟁으로 항존해 있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민족이 가져온 대일 감정이나 오늘의 저 세계화 정책에 대해 항쟁하고 있는 반미 감정과도 같았던 것이다.
이집트 교회의 초기 형태에 관해서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많은 외경 복음서들과 파피루스들에서 잘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이 모두 정경(성경)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2) 로마 제국 치하에서의 콥트 교회
주후 451년 칼케톤에서 공의회가 열린 때는 로마가 애굽을 통치하던 시절 로마기독교가 카톨릭 교리로 애굽의 토착종교를 이미 일원화시켜 놓았던 시기이다. 이때에 이집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디오스코루스(444-451)는 콥트 교회의 이집트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단성론적 입장을 변호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그것이 로마 교회가 채택한 삼위일체 이론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를 추방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이 이집트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반 비잔틴(반 로마제국) 감정을 분기시키게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모든 이집트 교인들은 디오스코루스의 입장을 지지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말했던 ‘성육하신 말씀의 한 품성’이라는 명제가 비잔틴 지배에 대해 항쟁하는 표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비잔틴 교회가 새로 임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이집트 출신의 친 비잔틴파인 프로테리우스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이집트 교회의 주교들은 그와 맞서 싸울 총 대주교로 디모테우스 아일루루스를 선출하여 별도로 축성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축성식 후에 일어난 폭동으로 비잔틴 교회가 임명한 총대주교 프로테리우스는 457년 성 금요일에 마침내 살해되고 말았다.
이때에 이집트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은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이 대중의 영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수도원 제도는 헬라 문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일반화되지 못했고, 그 대신 상부 이집트, 즉 남부 고지대에서 살고 있는 콥트족(이집트의 토작 원주민을 가리키는 말)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이 수도사들의 지도 아래서 이 콥트 족은 모두 단성론적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고 있던 단성론이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물과 포도주의 섞임처럼 혼합 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 사이에 결합처럼 하나로 합일되어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3) 아랍 점령 하에서의 콥트 교회
그동안 콥트 교인들은 칼케톤 회의의 결정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비잔틴(로마) 교회의 멍에로부터 해방하려고 무진하게도 투쟁적 노력을 해왔었다. 그래서 642년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침공해 왔을 때 이집트인들은 아랍인들을 차라리 하나의 해방군처럼 환영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함의 자손들이 다시 셈의 자손들의 멍에 밑으로 들어가는 시발이었다. 오래가지 않아 우마이야 왕조(661-750)시대에 이르러 점차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에 이집트인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랍인들이 가하였던 조세제도였다. 아랍인들은 그들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하여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포함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손바닥에 화인(火印)을 찍어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중한 멍에가 많은 이집트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했다.
이런 아랍인의 멍에가 압바스 왕조(750-868) 치하에서는 더욱 심해져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목에 5파운드(약 2kg)짜리 십자가를 걸도록 강요되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 이슬람의 멍에가 비잔틴 교회의 멍에보다 더 심한 것은 아니었다. 성인들의 전기를 보면 아랍 통치시대의 순교자 수보다 비잔틴 통치시대에 순교자의 수가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폭동과 유혈적 보복사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콥트 교회는 수도원 제도 속에서 유지되면서 콥트인의 민족적 전통을 계승해갔다. 그러나 아이유비드조(1171-1250) 시대에 와서는 많은 수도원들이 파괴되었고, 마므룩조(1257-1517) 치하 때에는 남아 있던 교회들과 수도원들마저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자 콥트인들은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를 불질러 버림으로써 복수했지만 다시 콥트인들의 대량 학살로 그 보복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16-19세기에 이르는 터키 제국시대에는 또 다른 새로운 박해와 대랑 학살이 이어졌다. 그러므로 이런 박해와 학살이 기독교인의 숫자를 더욱 급속하게 감소시켜 놓고 말았다. 그래서 6세기에는 168명의 주교들이 네 개의 관구, 즉 팬타폴리스와 리비아와 소아이깁투스 테바이스로 나누어 치리되고 있었으나 1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숫자가 더욱 급감하여 17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극소수, 즉 사천여 명의 기독교인들만이 예루살렘 주교의 지도 아래서 1741년 로마교황의 관할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었던 무하마드 알리(1805-1848)의 통치시대와 또 프랑스(1791)와 영국의 이집트 점령시대 이전까지는 여전히 이집트 기독교에는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하지 못했었다.

(4) 프랑스와 영국의 점령 하에서
총대주교 키릴루스 4세(1854-6) ― 생략

3. 콥트 교회의 관습과 전통
콥트 교회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은 그 교회의 성격과도 일치하고 있다. 그 관습에는 히브리적 특성과 서구 기독교적 특성과 이슬람교적 특성이 혼합되어 있어서 교리적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 정치적 관습이 이집트와 그리스와 아랍의 영향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으므로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여기서는 야고부스파 교회의 관습 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추려서 소개해 본다.

(1) 세례와 성찬
콥트인들에게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 멍에가 주어지는데, 즉 아이가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는 것을 방비하고 있다. 그래서 갓난 아이가 죽음의 위협을 받을 경우 즉시 교회에 찾아가 세례를 받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내세에 가서 장님이 될 것이라고 부모들은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아 세례는 남아는 생후 40일 만에, 여아는 생후 80일 만에 실시한다. 세례는 사제에 의해서 축성된 물 속에 세 번 침수함으로 실시되는데 이때에 사제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그대에게 성부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나는 그대에게 성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나는 그대에게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그래서 이 세례문이 삼신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여 비난을 받아왔다. 그리고 침례를 받기 전에 옷과 장식을 모두 제거하고 침례 후 견진례 때에는 흰 옷과 띠와 관을 새로 씌운다. 이 관습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의 경주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신앙에 싸움에서 약속된 승리를 쟁취한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할례도 병행하여 실시해 오고 있다. 콥트인들은 할례를 별개의 법이라 생각지 않고 단순히 우리 주님께서도 스스로 행하셨기 때문에 실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할례를 받는 연령은 2세에서 20세까지이다.

(2) 기독교교육
콥트 교회의 소년들은 시편과 복음서와 서신들을 제 나라말인 아랍어로 또 복음서와 콥트어로 읽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오늘날 콥트어를 문법적으로 배우지는 않고 있다. 비록 콥트어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언어일지라도 실제로 오늘날 죽은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대왕의 이집트정복 후 헬라어의 통용 강요와 로마적 기독교 신앙 강요, 이슬람의 정복 이후 이슬람식 문화 방식의 강요 등으로 인해서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들의 모든 문서는 아랍어로 되어 있고 콥트어는 구두로만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3) 기도
콥트인들의 개인기도는 가장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처럼 하루에 일곱 번 기도하고 걷거나 말을 타거나 일을 할 때에도 기도를 반복하고 있다. 경건한 자들은 기도 전에 반드시 손발을 씻고 일곱 번 기도하는 중에 시편 전체를 반복한다.

(4) 금식
이들에게 금식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교회는 오늘날도 사순절 55일 동안 금식을 하며 성탄절 전 28일 동안도 금식한다. 이런 금식절기 외에 예수 강탄 축일, 그리스도의 수세 축일, 수태 고지 축일, 종려주일, 부활절 승천 축일, 성령 강림절 등이 있다. 이런 축일에는 모든 교인들이 자선을 베풀며 기뻐한다.
모든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들이 입는 제의에는 교회의 직위에 마추어 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백색으로서 변모한 그리스도의 빛과 같이 흰 옷을 취하고 있다.

(5) 결혼
콥트인들의 결혼에는 두 가지 종교 의식이 있는데 약혼식과 대관식이다. 이것은 동시에 행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약혼식은 당사자의 친가에서 거행되나 결혼식(대관식) 만은 반드시 교회에서 실시된다. 이들에게 비밀 결혼이란 있을 수 없으며 결혼 금지 촌수 이내의 결혼도 허용되지 않는다. 약혼식 때에는 축성된 반지를 서로 교환하며 신랑은 신부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준다. 이것은 신부가 신랑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속한 몸인 것을 나타낸다. 대관식에서는 각자의 머리 위에 관이 씌워지며 십자가가 머리 위에 놓여진다. 그때 신랑 신부는 성체를 받게 되므로 그들은 그날 밤에는 금욕을 해야 한다. 머리의 관은 7일간 쓰고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교회를 떠나기 전에 벗는다.
이혼은 이론적으로 아내 쪽에서 간음을 했을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그것이 보다 덜 강력한 경우에도 해당되고 있다.

(6) 장례
콥트인들의 장례식은 외적인 면에서 이슬람교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7) 성직
콥트 교회에 속한 성직은 수사, 독서자, 차 부제, 부제, 사제, 주교, 총대주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조직 아래서 총 대주교는 주교들과 수도 대주교를 축성한다. 또 총 대주교의 선출이 무경쟁으로 이루어졌을 때는 사망한 직전 총 대주교의 손을 그의 후계자의 머리 위에 얹는 기이한 현상도 있다.
수도원에 속한 성직자들은 청빈, 동정, 복종이라는 세 가지 규율을 따라야 한다. 콥트 교회에 속한 수도사들의 특성은 다른 일반 수도사들처럼 자선과 학문과 전도생활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죄와 비참한 생활로 어두워진 이 세상과 사회에 빛과 정화를 가져다 주고자 하는 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부제와 사제는 수사 출신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결혼하지 않은 자거나 과거에 결혼했더라도 처녀와 결혼했던 자로서 현재 홀아비가 된 자여야 한다. 사제는 부제가 33세 되었을 때 가능하다.
주교도 반드시 홀아비거나 독신자여야 하나 현재는 모두 수사들 가운데서 선출되고 있다.
총대주교의 선출은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주교들 가운데서 성직자와 교민들에 의해서 선출되고 주교들의 안수를 통해서 축성이 되었다. 그러나 야고부스파와 말카파로 분리된 후, 특히 이슬람교의 이집트 정복 이후 선출 방식에 있어서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선출장소는 본래 알렉산드리아였으나 크리스토둘루스(1045) 시대 이후 카이로로 옮겨졌다. 그래서 오늘날은 카이로가 총 대주교의 거주지가 되었다. 선출방식은 만장일치제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 몇 달 혹은 몇 년까지도 걸린다. 이럴 때는 제비 뽑기로 결정을 하는데, 백 명의 후보 중에서 절차를 따라 세 명으로 압축시킨 뒤 세 명의 후보자의 이름을 세 개의 양피지에 기록하고, 한 개의 양피지에는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기록한다. 이렇게 해서 네 개의 양피지를 항아리에 넣어 제단 앞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삼 일 동안 기도한 후 한 어린아이로 하여금 하나의 양피지만을 꺼내 오게 하여 그 양피지에 이름이 쓰여 있는 후보가 즉시 총대주교로 선출된다. 이때 만일 그 양피지가 예수 그리스로의 이름이 쓰인 것일 때에는 세 후보를 모두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라 보고 다시 새로운 후보를 만들어 재실시한다. 48대 총대주교 요안네스와 71대 총대주교 카일이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선출된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예는 그 선출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보는 사례가 되므로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고 본다.
이렇게 선출되는 총대주교는 일정한 자격조건이 주어졌다. 예를 들면 50세 이상의 신체 건전한 자로 총각이어야 하고, 손에 피를 흘린 적이 없어야 하고, 선한 도덕적 성품을 지녀야 하나 높은 지식은 요구되지 않았으나 정통성을 확실히 가져야 했다. 그래서 제 71대 총대주교 카일의 축성식은 그가 콥트어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콥트어로 그 전례문을 다 암기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되기도 했다.

4. 콥트 교회의 단성론과 그 신학
단성론(monophysitism)이란 기독교 내의 일파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엄격히 말한다면 칼케톤 공의회(AD451)에 의해서 결정된 교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one person) 안에 두 본성이 있다는 교리로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교리를 거부하고 오직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한 본성(本性)만을 믿는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다.

(1) 칼케톤 회의 이전
그러나 위와 같은 사상을 주장한 사람들은 칼케톤 회의 이전부터 있었다.
① 안디옥의 루키아누스와 그 추종자들은 하나의 신 그 안에 고통과 제한을 지니고 있는 로고스, 즉 하나의 반쪽 신의 본성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을 인정).
② 콘스탄티노플의 유독시우스(Eudoxius AD370 사망)는 말씀이 육신으로 화한 것은 인정하였으나 말씀이 인간이 된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육신이라는 휘장을 통해서 자신을 현시했을 뿐이라고 했다(히브리적 사고, 즉 그리스도 안의 인성을 부정).
③ 라오디기아의 아폴리나리우스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나려 오셨다.”고 말 함으로써 두 개의 완전한 실체들이 한 합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했다(예수는 하나님 자체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뜻).
④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역시 아폴로나리우스를 따라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한 본성”이라는 공식 문구를 만들었다.

이러한 다양한 주장들은 로마적 서방 신학은 키릴루스와 아폴로나리우스주의의 극단적 입장을 피하고, 안디옥 학파의 길을 따라 한 위격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교리(Dyophysitism)를 확립했던 것이다.

(2) 칼케톤 회의 이후
444년 키릴루스가 사망한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좌는 디오스코루스가 맡게 되었다. 그의 지상 목표는 동양교회 내에서 알렉산드리아가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신학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갖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황제를 자기 편으로 그리고 로마가 자기를 반대하지 않는 한 그의 목적은 탄탄대로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로 하여금 449년 에베소 회의(후에 교황 레오1세는 이 회의를 강도회의라고 명명함)를 소집케 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시켰다. 즉 알렉산드리아 학파 유티케스를 복귀시키고 콘스탄티노플에 플라비아누스, 안디옥에 돔누스 또 키루스에 데오도테투스를 파면시켰다.
그러나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가 450년 7월 28일 사망하자 그의 누이 폴케리아는 황녀(왕비)의 허락을 받아 공의회를 다시 열어 신학상의 논쟁을 끝맺고 동방에서의 교회적인 균형을 콘스탄티노플로 복귀시키기 위해 레오 교황의 계획을 추진시켰다. 그래서 451년 칼케톤에서 제5차 세계교회 공의회를 소집하여 디오스코루스를 파면시켰다. 451년 10월 22일에 통과된 이 칼케톤 회의의 신조는 니케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와 에베소 공의회(431) 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여기서 채택된 공식 신조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고,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다. 그리고 이 두 본성은 혼합이나 변질이 없고 서로 나뉘거나 분리됨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황제 마르키아누스와 발렌티아누스 2세에 의해 법령으로 공포됨으로써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칼케톤 회의의 결과는 오래가지 않아 심한 반발로 이어졌다.
① 예루살렘지역의 수도사들은 배신자인 예루살렘 주교 유베날리스를 반대하고 수도사인 데오도시우스를 새 주교로 선출했다.
② 이와 같은 반발 운동이 이집트에서는 더욱 복잡해졌다. 사망한 디오스코루스를 대신하여 정부에서는 프로테리우스라는 사람을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레오1세가 등극하자 (454-457) 장로 디모테우스 아일루루스(Timotheus Aelurus)는 완전히 폭력에 의해서 주교좌에 앉혀졌다. 그런데 그는 철저한 단성론자였던 것이다. 457년 부활절에는 프로테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대성당 세례당에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티모테우스는 양성론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칼케톤 공의회에 대하여 아나데마(저주, 제물)를 선고했다. 그러나 그는 460년까지 자기의 지위를 확보했으나 460년 치열하게 투쟁하다가 결국 추방당하고 말았다.
③ 안디옥 대교구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오래 끄는 분쟁과 대립으로 교회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여기서도 칼케톤 공의회를 열열히 반대하는 장로 페트루스 풀로(Petrus Fullo)가 마르티우스 주교를 대신하여 새 주교가 되어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직위는 오래가지 못하여 471년 황제 레오에 의해 파면을 당하고 말았다.
④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동로마 정부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비잔티움과 로마 사이에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시급한 문제였다. 그래서 제노 황제가 482년 헤노티콘(Henotikon)이라고 불리는 새 신조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칼케톤 신조를 대신하여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었다. 즉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풀 공의회, 에베소 공의회를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를 거부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이였지만 단성론자들을 타협시키지 못해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문제는 이렇게 하는 것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전세계교회의 총대주교로 군림하려는 것이었는데 알렉산드리아가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때문에 484년 로마의 펠릭스 3세에 의해서 실행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와의 단결은 다른 편으로 단성론자들과의 완전한 단절뿐 아니라 네스토리안들과의 영원한 단절도 동시에 수반하게 했던 것이다.

(3) 신학
단성론자들의 신학적 견해는 다양해서 모두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오의 공한과 칼케톤 신조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만은 모두가 일치했다. 그래서 자카리아스 레토르는 칼케톤 신조를 가리켜 칭하기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우상이라고 했던 것이다. 극소수의 극단주의자들, 즉 아폴리나리우스와 유티케스의 가현설적인 추론을 따르는 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단성론자들은 키릴루스의 신학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는 경향이었다. 그 대표가 알렉산드리아의 디모데우스 아일루루스와 안디옥의 세베루스이었다.
이들이 특별히 레오의 공한을 반대했던 이유는 그의 편지에 나타난 바 각 본성은 영구히 서로 구별되는 성격과 특성을 가졌다고 하는 추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추론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합일성 안에서 각 본성은 물론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서로 교류하면서도 그 자신의 독특한 기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성론 자들에 의하면 각각의 본성에 따로 구별되는 행동 양식이 있다고 얘기하는 이론은 한 그리스도를 두 프로소파(위격)로 나누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품성도 자존하는 채로(Selfsubsistent) 남아 있지는 않으면서 그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퓨세이스가설은 두 휘포스타세이스(upostasei") 가설을 낳게 하고, 결국 네스토리우스의 그 혐오스런 이단을 낳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키릴루스의 입장과 디오니시우스의 입장과 일치시키면서 그는 로고스가 그 안에 품고 있는 그 완전한 신적인 본성과 위격을 취하고 있었다. “그 로고스는 육신을 취하는 그의 행동을 통하여 육신 곧 인간이 되신다. 이 로고스는 여자에게서 난 사람이면서도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사람으로 태어나기 이전의 그 로고스와 하나이시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가분리한 합일을 힘입어 로고스의 내적인 성격에는 손상을 입음 없이 로고스는 육신에게 자신의 영광과 권능을 변화시키고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 합일되는 요소들은 하나로 짜여진 본성, 즉 신-인적인 한 휘포스타시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들은 연유한다는 것이었다.

5. 맺는 말

527년 8월 1일 유스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서방에 대한 유스티아누스의 태도에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로마 주교좌를 교회의 최고 법정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황실이 그동안 단성론자들을 박해한 것이 중대한 실수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단성론자들과 화해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의 원대한 목표는 키릴루스의 가르침과 칼케톤 신조를 화해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단성론적 신앙을 가졌던 그의 황후의 독실한 믿음에 힘입어 폭동을 일으킨 단성론자들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래서 518년 파면당한 많은 유명한 주교들을 콘스탄티노플로 소집하여 회합을 시도했지만 회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533년 5월 15일 유스티아누스는 법령을 다시 공포하기를 칼케톤 회의야말로 그 이전의 세 공의회들과 신앙의 표준이 되는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스티아누스는 다시 비잔티움의 신학자 레온티우스(543년 사망)를 앞세워 계속 타협을 도모했다. 레온티우스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기초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본질은 곧 말씀 안에서라고 함으로써 그 본성이 비 위격이 아니라 위격 안에서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용어가 가진 뜻에 의해 칼케톤 신조는 그 실제 단어들을 하나도 다치지 않으면서 키릴루스의 교리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비잔틴 신학에 스콜라주의를 도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65년 사망했다. 그의 후계 황제들 아래서 콘스탄티노플 교구 안에 있는 단성론자들의 공동체는 6세기를 경과하면서 하나씩 둘씩 파괴되어가기 시작했다. 수도 비잔티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교구는 이집트 교구와 동방 관구들 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애굽의 콥트 교회가 오늘날까지 서구 교회와 분리된 독립 교회로서 유일하게 남게 된 것이다.
여기서 다시 반복해 보거니와 야벳의 후손인 현재 서구 기독교가 만들어 놓은 삼위일체 교리,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교리는 그 동안 많은 문제를 야기시켜 왔다. 셈의 후손인 동방의 네스토리안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함으로 로마제국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처단을 받았다. 그리고 함의 후손인 아프리카의 콥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함으로 로마 황제로부터 이단으로 처단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일방적 입장에서 가해 진 이단이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쌍방의 입장이 고려된 결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옳은 말이 될 것이다.

자료제공 :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월간[기독교교육] 2004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