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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종교 개혁의 선구자 위글리프
지역 종교개혁지 작성일 2012-09-18 조회수 0
중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제들과 유식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여러 시대 동안 기록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흑암의 시대는 지나가고, 많은 나라들에서는 날이 새는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여명을 개척한 사람이 바로 위글리프입니다.존 위클리프(Johnwycliffe)는 영국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을 위한 개혁의 선구자였습니다. 그가 허락을 받아 로마교에 제기한 큰 항의는 결코 침묵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항의는 마침내 개인과 교회와 국가의 해방을 초래하게 될 투쟁을 빚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클리프는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이미 놀라운 재능과 학식뿐만 아니라 그의 열성 있는 신앙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그는 모든 방면의 학문에 통달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스콜라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교회법과 국법, 특히 자기 나라의 법률을 공부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대학에 있을 때 성경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초기인 당시에는 성경이 고어(古語)로만 되어 있었으므로 학자들은 진리의 근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무식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와같이 개혁자로서의 위클리프의 장래의 사업에 대한 길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그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큰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 진리를 가르침으로, 그들은 진리의 지식을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도록 인도합니다. 위클리프는 성경 연구에 뜻을 두고 학교에서 학과를 공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그것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전에 얻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구원의 계획을 깨달았고,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업에 바치고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후세의 다른 개혁자들처럼 그의 사업의 초기에는 자기가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마교에 반대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투신하게되자 그는 필연적으로 거짓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교왕권의 오류가 분명해지면 질수록 더욱 열렬하게 성경의 교훈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로마교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오류를 발견하는데 예민한 사람이었으므로 로마교의 권위로 승인한 여러 가지 악폐에 대하여 기탄없이 공격하였습니다. 그는 국왕의 왕실 목사로 재직할 당시에 교왕이 영국 국왕에게 요구하는 조공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에 섰으며, 교왕이 세속적 통치자를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는 것은 이성과 계시에 어긋나는 일임을 보여 주었다.

이 개혁자가 오랜 시일을 두고 단호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온 또 하나의 악폐는 탁발숭단(托鉢僧團) 제도입니다. 이 탁발승들은 영국 안에 너무 많이 있었으므로 국가의 번영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탁발승의 영향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둔 생활(隱遁生活)에 몸을 바치도록 권유를 받았습니다. 이리하여 로마교의 지도자들은 옛날 바리새 교인들처럼 그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정들은 황폐되었으며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교왕은 사제들에게 사람들의 자복을 듣고 용서해 주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죄악의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제들은 그들의 사복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떠한 죄악을 고백하든지 곧 사면하여 주므로 그 결과로 가장 악한 죄악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학식 있고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탁발승의 제도를 개혁하고자 수차 시도하였으나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민한 통찰력을 가진 위클리프는 그 제도 자체가 거짓된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악의 뿌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탁발승단을 반대하는 소책자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들과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을 성경과 그 저자 되시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위클리프는 로마 교왕의 침략적 세력에 대항하여 영국 국왕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다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왕의 사신이 되어 네덜란드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교왕의 사절들과 회의를 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승려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들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가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그는 칙명(勅命)으로 루터워드의 교구장(敎區長)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적어도 국왕이 그의 솔직한 말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위클리프의 감화는 긍정의 태도를 결정하고 국민들의 신념을 형성하는 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곧 교왕의 진노와 위협이 그에게 다가왔다. 대학과 국왕과 감독들에게 보내는 세 가지 교서가 영국으로 급히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모두 그 이단의 교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교서가 하달되기 전에 이미 감독들은 격분한 나머지 위클리프를 법정으로 소환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가장 세력 있는 두 왕족이 그를 동반하여 법정에 임석하였고, 군중들이 법정 밖을 에워싸고 마침내 법정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소동까지 일으켰으므로, 재판을 진행하던 법관들도 이를 두려워하여 심문을 잠깐 중지하고 그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독들이 나이 많은 에드워드3세로 하여금 그 개혁자를 배척하도록 하고자 꾀하였으나 얼마 후에 그 왕은 죽고, 전에 위클리프를 보호하던 이가 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서가 도착되자 이단자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라는 엄한 명령이 온 영국에 선포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분명히 화형주(火刑柱)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클리프는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로마의 보복의 희생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 이었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노독 중의 한 사람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너의 방패라"(창 15:1)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손을 펴사 당신의 종을 보호하셨습니다. 죽음이 다가왔으나 그 죽음은 개혁자에게가 아니고 도리어 개혁자에게 죽음을 선고한 법왕 자신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레고리우스 Ⅱ세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클리프를 심문하기 위하여 모였던 교직자(敎職者)들은 부득이 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클리프는 그의 주님처럼 빈곤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루터워드의 교구 안에 있는 비천한 백성들에게만 빛을 전하는 것으로 흡족히 여기지 않고, 영국의 각 곳에 전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그 목적을 위하여 진리를 사랑하며 그것을 널리 증거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아니하는 단순하고 경건한 선교사들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지 가서 시장(市場)에서나 대도시의 거리에서나 시골의 길가에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들은 늙은이들과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교의 신학교수로서 그 대학의 강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의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게 진리를 너무도 성실하게 소개하였으므로 복음박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최대의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진리와 의미라는 저서에서 자기가 성경을 번역하여 영국 국민으로 하여금 모두 자국어로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을 읽을 수 있게 할 뜻이 있다는 것을 표명하였습니다.드디어 사업이 완성되어 최초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국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도 인쇄기가 발명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경의 부수를 증가시키려면 더디고도 번거로운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복사하는 일을 자원하여 담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되는 만큼의 부수를 공급하기는 어려습니웠다.

성경이 나오게 되자 교회의 당국자들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위클리프보다 더욱 강한 것, 곧 그들의 무기도 거의 소용 없을 정도의 큰 힘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교의 지도자들은 개혁자의 소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다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감독들의 종교 회의에서 그의 저서를 이단이라고 선고하고, 그들은 젊은 왕 리챠드2세를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누구나 금지된 교리를 지지하는 자는 투옥시킬 것이라는 칙령을 반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회는 위클리프의 감동적인 호소에 감화를 받고, 핍박하는 칙령을 철회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개혁자는 다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나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전부라고 믿는다…로마 감독이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복음의 율법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세속적 위엄이나 명예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태도에 가깝게, 또한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였다…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당시의 생애는 가장 빈곤하고, 모든 세속적 권력과 명예에서 떠난 생애였다고 위글리프는 증언하였습니다.
어떤 신실한 사람도 교왕이나 어떤 성인을 따라갈 때, 그들이 바로 주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 그 점에 있어서만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대신에 세속적 명예를 사모함으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와같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마치었다. "우리 하나님께서 교왕 어반6세의 마음을 감동하사 그가 친히 본을 보여 그의 교직자들과 함께 그 생활과 태도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또한 그들이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신실히 주님을 따르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하는 바이다. "이와같이 위클리프는 교왕과 그의 추기경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나타내 주었고 이들이 대표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주님과 그들 자신과의 현저한 차이를 그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에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자기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충성한다면 자기의 생명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왕과 교왕과 감독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그는 늦어도 수개월 후에는 틀림없이 화형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앗습니다.

위클리프는 암흑 시대의 흑암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와같이 개혁 사업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그 전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침례 요한과같이 그는 특수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어난 새 시대의 선구자였습니다. 위클리프가 착수한 위대한 운동, 곧 양심과 지성을 해방시켜 주고, 질곡(桎梏)에 속박되어 있던 여러 나라들에게 자유를 준 운동의 근원은 성경입니다. 14세기 이래 각 시대를 통하여 마치 생명수처럼 흘러내린 축복의 근원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위클리프는 단순한 마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감의 계시요, 믿음과 행실의 완전한 표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영국의 국왕들은 로마 교왕의 지지를 얻어 자기들의 권세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개혁자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복음의 사도들에 대하여 화형의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순교자가 계속하여 뒤를 이었습니다. 마치 사도시대의 제자들과같이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세상의 재물을 희생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40여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John Huss)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버리고 개혁 사업을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서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마는, 진리의 씨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뿌려진 것입니다. 그 사업은 보혜미아에서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